차가움 속의 열정, 미하일 플레트네프의 쇼팽&스크랴빈 전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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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움 속의 열정, 미하일 플레트네프의 쇼팽&스크랴빈 전주곡

2025.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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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움 속의 열정, 미하일 플레트네프의 쇼팽&스크랴빈 전주곡

무대 위로 걸어 나오는 미하일 플레트네프(Mikhail Pletnev)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언제나 한결같습니다. 관객들의 박수갈채가 쏟아지지만 심드렁한 표정으로 짧은 목례를 건네죠. 그래도 피아노 앞에 앉아 차갑고 무심한 눈빛으로 건반을 내려보다 연주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의 손끝에서 펼쳐지는 음악은 놀랄 만큼 색채적이고 다양한 감정이 표출됩니다. '플레트네프는 사진으로만 보면 우울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의 음악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한 어느 칼럼니스트의 평이 무슨 말인지, 플레트네프의 연주를 한 번만 보면 바로 이해할 수 있죠.

플레트네프의 이번 앨범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주목할 부분이 있습니다. 우선, 2005년 이후 처음으로 도이체 그라모폰(DG) 레이블을 통해 그의 스튜디오 앨범이 발매된다는 점입니다. 물론 2005년 이후에도 플레트네프는 실황 앨범이나 컴필레이션 앨범처럼 DG와 간헐적인 작업을 진행하긴 했지만, 이번처럼 본격적인 피아노 독주 스튜디오 앨범을 함께하는 것은 무려 20여년 만이죠. 어느덧 일흔을 앞두고 있는 거장이 모습으로 DG와 함께한다는 점은 분명 특별합니다.

또한, 이번 앨범은 1980년대 이후 DG에서 최초로 시도되는 순수 아날로그 방식의 녹음이라는 점도 특징적입니다. 디지털 레코딩의 편리함 대신 마스터 테이프를 사용해 소리를 녹음하고 물리적인 편집 과정을 거치는, 어떻게 보면 '역행'이라고 할 수 있는 녹음 방식이었죠. 심지어 단일 세션으로 4시간 반 만에 모든 녹음을 마치는 '괴력'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구간 하나를 수십 번씩 반복하여 녹음하는 요즘의 레코딩 흐름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결과물인 것이죠.

그렇다면 플레트네프는 왜 이런 수고로움을 감수하면서 아날로그 레코딩을 한 것일까요? 그것은 그의 '추구미'와 연관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플레트네프는 피아니스트들이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스타인웨이 피아노 대신 시게루 가와이(Shigeru Kawai)라는 일제 피아노를 고집합니다. 현대 피아노의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 한동안 연주 활동을 멀리 했던 그를 다시 무대 위로 오르게 한 피아노죠. 아마도 플레트네프는 묵직한 음색과 섬세한 뉘앙스가 공존하는 시게루 가와이의 매력을 제대로 포착하기 위해서는 미세한 잡음이 섞여 들어가더라도 아날로그 특유의 밀도 높은 질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플레트네프가 이번 앨범을 위해 선택한 작품은 쇼팽 24개의 전주곡 Op. 28과 스크랴빈 전주곡 Op. 11입니다. 쇼팽의 전주곡은 잘 알려졌다시피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되었습니다. 특히, 쇼팽은 이 작품을 통해 역사적으로 단순히 음악의 도입부의 기능을 하던 전주곡이라는 장르를 하나의 독립적인 예술음악 장르로 승화시켰죠. 수많은 피아니스트들이 녹음하고 또 연주한 이 고전과도 같은 레퍼토리에서도 플레트네프의 음악성은 빛을 발합니다. 물론 플레트네프의 연주가 요즘 젊은 피아니스트들만큼 테크닉적으로 완벽하고 뜨겁게 불타오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희로애락을 담아 연주하는 그만의 쇼팽은 마치 우리의 삶을 닮았습니다.

스크랴빈의 전주곡은 쇼팽에 대한 존경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도전이기도 했죠.

쇼팽 사후의 작곡가들은 피아노곡을 쓰며 항상 쇼팽의 영향을 느꼈습니다. 스크랴빈 역시 마찬가지였죠. 전주곡 작곡에 처음 착수했을 당시 10대 후반의 어린 나이였던 스크랴빈은 쇼팽으로부터 많은 음악적 아이디어를 얻으면서도 자신만의 색채를 부여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낭만주의적인 유려함과 러시아적인 우수, 스크랴빈의 폭발적인 에너지가 공존하는 걸작이 탄생했죠.

플레트네프는 '음악의 영혼은 음표 안이 아니라 그 밖에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그의 말처럼 플레트네프라는 한 피아니스트가 빚어내는 소리는 단순히 건반을 눌러서 나는 소리 외에도 음표 사이의 침묵, 그리고 긴 세월을 음악에 헌신한 한 음악가의 삶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죠.

Album

Mikhail Pletnev [Chopin & Scriabin: 24 Preludes]

Chopin & Scriabin: 24 Preludes

곡리스트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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