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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장수 혼성 밴드, 자우림의 음악 세계
요즘 밴드 신엔 무엇보다 밴드의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난 팀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악기 구성, 성별, 장르 등 그 모든 영역에서 말이죠. 그리고 오늘날 꾸려진 밴드 신의 다채로운 생태계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첫 장에는 기필코 이들의 이름이 출현합니다. 바로 자우림입니다.
자우림은 1997년 결성 이래 약 30년 가까이 국내 최장수 혼성 밴드로서 그 지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습니다. 변수가 많은 밴드 신에서 수십 년 넘게 활동을 이어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극히 어려운 일로 보는 게 맞을 겁니다. 각자 악기를 연주하는 밴드 멤버들이 음악적 견해를 하나로 일치시키는 것도 난제인데, 이를 수십 년동안 쉬지 않고 해온다는 것이니까요.
더군다나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한 밴드가 전국민이 아는 히트 곡을 차례차례 발표하며 국민 밴드라는 타이틀을 유지하는 건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요. 대한민국의 장수 밴드들을 향해 후배 뮤지션들이 존경심을 비추는 연유도 바로 이 어려움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혼성 밴드로서 그 지위를 점하는 팀은 단연 자우림 뿐입니다. 김윤아, 이선규, 김진만 세 사람이 우직하게 이 길만을 고수해온 결과입니다.
자우림이 데뷔했던 1990년대 후반은 언더그라운드의 태동과 함께 한국 음악 신에 젊은 피들이 흘러들어왔던 시기입니다. 사회적으로는 IMF의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고요. 당시 홍대에서 '미운오리'로 활동하던 자우림의 멤버들은 밴드를 개편해 '자주색 비가 내리는 숲'이라는 뜻의 '자우림'으로 팀명을 바꾸고, 영화 '꽃을 든 남자'의 주제곡 'Hey Hey Hey'로 데뷔했는데요. 이 곡이 크게 히트하며 대중에게 눈도장을 찍을 수 있었습니다.
머지않아 자우림은 정규 1집 [Purple Heart]를 발표합니다. '일탈'과 '밀랍천사'로 대표되듯 당시 신인 밴드의 패기를 체감할 수 있는 초기작인데요. 위 두 곡에서는 무료한 청춘의 과감한 탈선을 그리는가 하면, '안녕, 미미', '파애'에서는 중견 가수 못지않은 호소력을 보여주더니, '애인 발견!!!'과 '예뻐'에서는 풋내기의 사랑을 그리기도 합니다. 이처럼 '어딘가 엉뚱하고 기이한 음악 세계'는 지금까지도 통용되는 자우림 음악의 성격이기도 한데요, 달리 말해 이들은 시작부터 자신들의 차별성을 영리하게 구축한 밴드였습니다.
이들의 영리함은 불과 1년 뒤 발매된 2집에서 돋보이기 시작합니다. 2집은 같은 테마에 각기 다른 사운드를 입힌 '연인(戀人)' 3부작, 히트곡으로 꼽히는 '미안해 널 미워해'를 포함, 다수의 사회비판적인 곡들도 함께 수록되어 있는데요. 청소년 자살을 다룬 '낙화(落花)', 노숙자 문제를 다룬 '이런데서 주무시면 얼어죽어요', 가부장제를 유쾌하게 비꼰 '김가만세(金家萬歲)'가 그러합니다. 전작에서는 유쾌한 청춘의 면면을 비추었다면, 2집에서는 한국 사회의 어두운 민낯을 과감하게 드러내며 공감을 샀지요.
오늘날 골수 팬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타락천사 자우림의 모습이 녹아든 게 2집이었다면, 대중들이 기억하는 데뷔 초 자우림의 음악은 바로 3집 [Jaurim, The Wonder Land]에 좀 더 맞닿아있을 겁니다. 특히나 '매직 카펫 라이드'의 공이 컸는데요. 이 곡이 대히트를 하면서 자우림은 국민 밴드의 반열에 들 수 있었습니다.
이 앨범을 발매하기 전 자우림은 2.5집 [B정규작업(定規作業)]을 통해 기작업물들을 새로운 사운드로 들려준 바 있는데요. 이 실험성은 3집의 '적루(赤淚)', '그녀와 단둘이'에서도 드러납니다. 당대 가요계에서 유행했던 테크노 장르를 접목시켜, 이후 펼쳐질 자신들의 변화무쌍한 음악 세계의 기반을 닦았습니다.
다시 한번 자우림의 이름으로 크게 웃다. '하하하'!
3집의 성공에 이어 '하하하쏭'의 대히트는 자우림을 밴드 신 최강자의 자리를 점하게 했습니다. 이 곡이 수록된 5집 [All You Need Is Love]은 반항기 가득한 펑크 정신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는데요. '#1'에서부터 시작해 '팬이야'처럼 전반적으로 장엄한 분위기가 감돌던 4집과는 명백히 다른 노선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하하하쏭'은 물론, '17171771', '거지'에서 이를 체감할 수 있고요.
6집 [Ashes To Ashes]는 이 땅에 발을 디디고 서는 청춘들의 절망을 그려냈습니다. 장르적으로는 블루스에 기반을 두었는데요. 이는 6집의 서정성을 암시합니다. 록은 블루스로부터 기원했으니, 다시 말해 록의 뿌리를 직시하는 작품이기도 했고요. 잿빛의 앨범 재킷이 보여주듯 내면의 어둠을 표현한 트랙이 주를 이루는데요, 우리는 이 앨범에서 오늘날 자우림의 초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앨범 속 '위로', '샤이닝'이 발매 20년이 가까워진 지금도 많은 사랑을 받는 사실이 그를 방증합니다.
2010년대. 재기발랄하게 데뷔했던 자우림 멤버들도 어느덧 중년에 접어들었습니다. 그 사이 한국의 청년들은 더 오래, 더 깊이 절망했고요. 어렸을 적의 희망과는 다르게 더 잔혹해진 사회 속에서 갈 길을 잃은 청년들의 플레이리스트 속엔 늘 자우림이 존재했습니다. 이들이 청년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세상에 나온 게 밴드 커리어의 정점으로 불리는 9집 [Goodbye, grief.]입니다. 슬픔으로 몸부림치는 어떤 이의 이야기를 담은 이 앨범은 이 세대를 살아가는 청춘들의 폐허를 핍진하게 묘사합니다. 무기력한 청춘의 각성을 그린 '이카루스', 이별의 죄의식을 담은 'Anna', 'Dear Mother'. 그리고 먼 훗날 청춘송가가 된 '스물다섯, 스물하나'까지. 끝끝내 좌절한 우리들에게 '슬픔이여 이제 안녕'이라며 실낱같은 희망을 쥐여주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천착하는 청년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면서 자우림은 우리 시대의 테라피스트로 군림할 수 있었습니다. 삶은 지난한 일상의 연속이라는 걸 알게 된 우리는 자우림의 음악으로 웃고, 울었으며, 크게 소리를 지르기도, 분노하기도 했고요. 단순히 히트송으로 무장한 것을 넘어 가장 어두운 마음을 들여다보는 과업까지 수행한 자우림에게 젊은 팬들이 끝없이 유입되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부터였을 겁니다. 특히나 2020년대에 이르러 '스물다섯, 스물하나'가 차트에서 역주행을 일으킨 사례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자우림이 현재의 위치를 공고히 다진 건 그 이후부터입니다. 데뷔 이후 최초로 셀프 타이틀로 내세운 10집은 어떤 미사여구 없이 '자우림'이라는 이름만으로 모든 걸 수긍하게 했는데요. 장렬한 오프닝으로 문을 여는 '狂犬時代'는 통렬한 사회비판을, '있지', '영원히 영원히'는 밴드 특유의 서정미를 담았습니다. 자우림이 가장 잘하는 음악들로 꾸려진 앨범이니, (발매 당시) 지난 20년의 궤적을 총망라한 앨범과도 같았지요. 그렇기에 이 앨범의 이름은 '자우림'이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2020년. 전무후무한 팬데믹으로 세계는 멈췄습니다. 온 지구가 절망으로 물들었던 시기, 자우림은 지친 리스너들에게 힘이 되고자 우울한 분위기로 작업하던 신보의 방향을 비틀어 경쾌한 음악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EP [HOLA!]가 세상 밖에 나왔는데요. 출구가 막힌 세상 속에서 살아남은 우리를 축복하며, 침울한 우리 일상의 채도를 끌어올렸습니다.
그리고 팬데믹 시기에 작업했던 곡들은 정규 11집 [영원한 사랑]으로 발매되었습니다. 낭만적인 제목과는 달리 역설적인 스토리텔링이 돋보이는 작품인데요. 밀려오는 파도에 발버둥치는 마음도 삶을 향한 '영원한 사랑'에서 기인할 수 있습니다. [HOLA!]에서 보여주었듯 삶은 단순히 일상의 연속이 아닌 생존의 연장이라는 점도 간과할 수 없고요. 내가 살아남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살아남으며 '우리'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아주 단순한 명제지만 세상을 연결하는 사슬이 끊어진 코로나 시대에는 이조차도 아득하게만 느껴졌고요. 모두가 망각하던 이 사실을 자우림은 [영원한 사랑]에서 명료하게 짚어줍니다. '불행한 날도 있겠지 / 그래도 우린 함께 있겠지 / 언제까지라도'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그리고 오랜 기다림 끝에 자우림이 정규 12집으로 돌아옵니다. 신보 [LIFE!]는 '친숙함과 낯섦 사이'를 배회하는 앨범인데요. 글래머러스 록, 신스팝, 스윙까지 밴드의 관록을 엿볼 수 있는 사운드를 넘어, 서사적으로도 '삶'의 다양한 면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자우림의 색, 그리고 위에 덧칠한 보랏빛 환영들로 가득찰 자우림의 12집, [LIFE!]는 하단에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IMF부터 팬데믹에 이르기까지 함께한 세월도 어언 30년. 시대와 함께 공명한 자우림은 그간 우리 삶이 즐거울 때는 마법 융단을 쥐여주며 더 높이 날라고 격려했고, 삶이 괴로울 때는 '비굴한 인생은 그대에게 어울리지 않' (하하하쏭)다며 우리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인생의 끝없는 희로애락을 노래하며 비로소 '국민'들의 밴드로 남은 자우림, 그리고 그들이 가꾼 보랏빛 숲으로의 열두 번째 초대에도 기꺼이 응해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