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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활한 우주와 영원한 시간 사이, 한 음 한 음 스며드는 에이나우디의 음악
긴장했던 몸을 이완하고 깊은 호흡을 시작한다. 한 호흡 들이마셨다가 더 길고 가늘게 호흡을 내뱉는다. 들숨보다 날숨을 길게 이어나가며 호흡하는 동안 분주했던 마음이 차분해진다.
루도비코 에이나우디(Ludovico Einaudi)의 음악을 들을 때면, 광활한 자연 속에 서 있는 기분이 든다. 끝이 보이지 않는 설원의 고요함. 나를 압도시키는 웅장한 바위산. 살랑이는 숲 속의 키 큰 나무들. 부서지는 파도와 윤슬이 반짝거리는 바다. 해 질 녘, 수평선 너머로 태양을 바라보는 순간과 같은.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에 말없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대자연 앞에 나의 존재가 작게 느껴지고, 그래서 묘하게 위로가 되는 그런 순간들이 떠오른다. 그의 음악은 단순한 선율을 반복하지만, 그 속에는 온기가 있다. 차갑지만 따뜻하고, 어딘가 쓸쓸하지만, 그 안에서 평온함을 느끼게 한다.
실제로 에이나우디는 이탈리아 북서부 피에몬테 지역에서 자라 그곳의 자연과 풍경이 음악 스타일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여전히 피에몬테 지역의 포도원 농장에서 음악을 만들며, 2019년에는 국제환경단체 그린피스와 함께 북극을 보호하자는 의미를 담아 노르웨이 스발바르 제도의 빙하 위에서 'Elegy for the Arctic'을 연주하기도 했다.
자연이 느껴져서일까. 그의 음악은 호흡을 닮았다. 도입부부터 집중하다 보면, 절로 심호흡을 하게 된다. 그 일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는 듯이, 몸이 먼저 반응한다. 에이나우디의 대표곡 중 하나로 영화 '언터처블'의 OST로도 쓰인 'Fly'는 단 두 개의 노트로 시작해 한 음 한 음이 조심스럽게 공간을 만들 듯, 단순한 멜로디가 반복되며 감정을 쌓아 올린다. 이탈리아어로 '들어봐'라는 뜻을 가진 'Ascolta'는 잔잔한 피아노 선율이 호흡을 조절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의 앨범 'Underwater'에 수록된 곡들은 물속에서 숨을 쉬듯 유려하게 흐르며, 급하게 쏟아내지 않고 천천히 가라앉으며 내면 깊은 곳까지 흘러든다. 'Rose Bay'는 언젠가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잠시 추억에 젖어들게 만든다.
그의 대표곡 중 하나인 'Nuvole Bianche'에는 개인적으로 특별한 기억이 있다. 이탈리아어로 '흰 구름'을 뜻하는 이 노래는 내게 가장 슬프고도 아름다웠던 한 해를 기록할 때 배경이 되어준 음악이다. 회사를 그만두고 떠난 1년간의 여행. 그곳에서 마주한 수많은 광경들. 모든 순간이 반짝거리며 빛났던 모험을 마치고 돌아온 뒤, 같은 해에 사랑하는 아빠를 갑작스럽게 떠나보냈다.
벅찬 기쁨과 깊은 슬픔이 교차하던 그 해, 가장 많이 들었던 음악이 'Nuvole Bianche'였다. 나는 그 시간을 책으로 기록했고, 글 한 편 한 편마다 배경음악을 함께 담았다. 그중에서도 Nuvole Bianche를 배경음악으로 선택한 챕터에는 '광활한 우주와 영원한 시간 사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이런 글을 썼다.
타이밍만 다를 뿐, 사람이라면 누구나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 그런 생각이 떠오를 때면 나는 또 엉엉 울고 싶어졌다. 세상에 잠시 왔다가 갈 뿐인 우리의 유한함이 너무 여리게 느껴졌다. 소중하게 다루지 않으면 금방 부서져 버릴 것처럼. 그런데 동시에 이런 생각이 이상하게 위안이 됐다. 무한한 우주에 모래알보다도 작은 별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영원이란 시간 속에 각자 정해져 있는 시간을 하루하루 살아가는 우리가, 작고 연약하게 느껴지면서도 강하고 경이롭게 느껴졌다.
(...) 우주에 작은 점조차도 되지 않는 우리의 존재가 때론 하루살이 먼지처럼 보잘것없게 느껴질지 몰라도,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던 엄청난 사실 중 하나는 온 우주를 뒤져도 당신은 당신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70억 인구를 뒤져도 당신은 단 한 사람이다.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도 영원한 시간이 있었고, 죽고 난 이후에도 영원한 시간이 흐르겠지만, 딱 당신 같은 사람이 세상에 나타나 살아가는 건 지금 이 순간뿐이다.
- 정혜윤 '퇴사는 여행' 중
에이나우디의 피아노 선율은 흔히 '미니멀리즘'을 기반으로 한다고 하지만, 나는 그것이 단순함 이상의 무엇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함과 여백 속에 깃든 광활함. 무한한 우주를 가장 많이 채우고 있는 것이 빈 공간인 것처럼, 그의 음악 역시 한 음 한 음이 여백을 품으며 길을 만들어간다. 그리고 우리는 그 길을 따라 홀로 자기만의 여행을 떠난다.
사람들과 함께 떠나는 왁자지껄한 여행이 아니라, 나 자신과 대화하며 걷는 모험.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소중한 시간을 되새기고, 그 시간을 더욱 선명하게 알아차리는 여정이다. 그의 음악은 그렇게 우리를 잔잔히 위로한다.
아주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 마치 지구를 벗어나 우주에서 창백한 푸른 점을 바라보는 기분. 그 안에서 나는 아주 작은 존재지만, 동시에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선명하게 존재한다. 과거와 미래의 교차점에서 바라보는 현재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그의 음악을 들으며 다시 한 번 알아차린다.
오는 4월, 루도비코 에이나우디가 8년 만에 한국을 찾는다. 나는 엄마와 함께 좋은 자리를 예약해 두었다. 그의 음악을 수없이 들어왔지만, 실제로 마주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 설렘과 기대가 크다.
그날, 우리는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음악을 들으며 각자의 기억 속으로 여행을 떠날 것이다. 마치 오래된 캠코더 속에 잠들어 있던 장면들이 다시 재생되듯, 음악이 흐르는 순간마다 마음속에 품고 있던 순간들이 깨어날 것이다.
다시 한숨을 들이마시고, 한숨 내뱉는다. 한 음 한 음, 정성스럽게 귀 기울여 집중해 본다. 에이나우디의 손끝에서 펼쳐질 피아노 선율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기대해 본다.
글_정혜윤(@alohayoon) | 작가, 마케터이자 인플루언서 『퇴사는 여행』 저자
이탈리아 출신 네오클래식의 거장,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루도비코 에이나우디가 8년 만에 내한한다.
루도비코 에이나우디는 현재 세계적인 열풍을 선도하고 있는 현대음악의 거장으로, 전 세계 음원 사이트에서 가장 많이 스트리밍 된 클래식 음악가로 이름을 올렸다. 최근 집계에 따르면 그의 음악은 매년 약 90억 회 이상 스트리밍 되고 있으며, 음원 스트리밍 플랫폼 '스포티파이'에서는 모차르트, 베토벤보다 인기가 많은 작곡가다. 그의 음원 'Experience'의 틱톡 누적 조회 수는 156억 회가 넘으며, 2022년 발매된 앨범 [Underwater]는 일주일 만에 영국 클래시컬 차트 1위에 올랐다. 에이나우디는 북극의 빙하 위에서 연주한 'Elegy for the Arctic'으로 환경 문제를 조명하며 전 세계의 이목을 끌었고, 그의 음악은 아카데미상 수상작인 영화 '노매드랜드', '더 파더' 등의 OST로도 삽입되며 깊은 인상을 남겼다.
현재 에이나우디의 공연은 세계 곳곳에서 매진 행렬을 이어가고 있는데, 2025년 3월 프랑스에서 열릴 2만 명 규모의 아코르 아레나에서의 공연이 벌써 매진되고, 여름에 예정된 영국 로열 앨버트 홀의 5회 차 공연이 순식간에 매진되는 등 그의 신드롬적인 인기는 계속되고 있다. 현재 2025년 상반기에 예정된 30여 개가 넘는 유럽 투어 중 11개가 이미 매진된 상태다.
루도비코 에이나우디는 이번 4월 2일(수) 세종문화회관에서의 내한공연에서 'Experience', 'Una Mattina'와 같은 그의 히트곡들을 비롯한 1월 31일 발매된 17번째 정규앨범 [The Summer Portraits]의 신곡들도 선보일 예정이다.